요즘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데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진보진영의 의견은 ‘이렇게 흠결이 많고, 명백하게 서민의 이익에 반하는 공약을 내세운 후보를 도대체 왜 사람들이 지지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현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중도 좌파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이나 재야 시민단체에서는 중도 우파인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이 경제적 양극화를 심화하고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서민이 등을 돌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극우파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이나 그 지지자분들은 주로 대북정책 등에서 그들보다 전향적인 정책을 편 점에서 ‘빨갱이’라고 몰아부치는 전통적인 비난을 되풀이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양쪽의 의견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요? 과연 이번에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의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서민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편 때문일까요, 아니면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너무 ‘빨갱이’ 짓을 해서 나라를 말아먹은 때문일까요?
일단 민주노동당이나 시민단체, 문국현 후보 등 진보진영에서의 비판을 검토하여 봅시다. IMF 외환위기 이후에 이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서민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준 것도 틀림없고요. 그리고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이런 변화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보호막을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던 것은 결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IMF 외환위기는 제조업 경쟁력이 뒤쳐진 미국자본이 금융자본을 이용해서 세계의 자본주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서 꾸민 전 지구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해지펀드로 대표되는 미국 월가의 자본이 제3세계의 취약한 자본시장을 교란하여서 국가부도를 일으키고 기업들을 싼 가격에 사들이기 위해서 꾸민 일이었지요.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세계화 정책’에 의해서 이에 휩쓸린 것이고 말입니다. 중도 우파 혹은 민족주의 우파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씨와 그 후계자인 노무현 씨는 이런 상황에서 나라의 키를 잡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천연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외환위기로 인한 채무 불이행(디폴트) 상태가 된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참사가 될 참이었습니다. 지금의 북한과 똑같은 상태가 되겠지요. 석유나 식량의 수입이 중단되면서 서민 대다수는 굶주림에 허덕이게 될 것이고,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도 올 스톱이 될 것이었습니다. 디폴트 상태에서의 무역은 구상무역을 통한 물물교환밖에는 할 수 없게 됩니다. 구상무역에서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석유나 지하자원, 식량 등이 가장 좋습니다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자원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집권자가 얼마가 고심을 하였는지 이해가 가시겠지요? 천연자원이 철철 넘치던 러시아조차도 디폴트 선언 후 젊은 처녀들이 돈벌이를 하려고 우리나라까지 가축처럼 팔려왔던 사실을 우리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아르헨티나처럼 식량이 많고 천연자원이 넘치는 나라도 디폴트 선언 직후 고기 한 토막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참극이 벌어지던 것을 TV 화면을 통해서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도 그런 꼴이 될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일단 외환을 들여와서 무역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울며겨자먹기로 미국 자본의 하수인인 IMF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 정책을 따라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처럼 저항할 수 없었냐는 비난이 요즘에 나오고는 있지만, 그건 말레이지아처럼 무역 의존도가 낮고 천연자원이 많은 나라와 대한민국처럼 무역의존도가 높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의 처지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이야기하는 철부지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때의 구조조정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로 대표되는 국내 자본주의 형태를 완전히 미국식으로 바꾸는 그야말로 천지개벽하는 변화였습니다. 이런 구조조정의 여파가 중도 우파 집권기간인 10년 내내 지속된 것입니다. 따라서 왜 양극화에 대한 사회보장제도를 완비하지 못한 것을 비난한다면 모를까 ‘제대로 좌파적 정책을 추진하지 않아서’ 비난한다는 말은 너무나 무책임한 비난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글자그대로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인 것이지요.
또한 김대중씨나 노무현씨가 중도 우파이지 결코 좌파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두 사람은 철저하게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신봉하는 우파 정치인들입니다. 민족을 중시하여서 남북화해를 추진한 점이나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 땅에 도입하고 한미 FTA로 미국과 경제통합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하등의 논리적인 혹은 윤리적인 모순이 없었던 이들입니다. 국민들은 그들에게 중도 우파적인 정책을 추진하여서 외환위기를 돌파하고 남북화해를 추진하여서 이 땅에 전쟁위험을 줄여달라고 기대한 것이지,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복지정책을 확충하라는 ‘좌파적 정책’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그런 기대를 하였다면 민주 노동당에게 표를 던졌어야죠. 우리 국민들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보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중도 우파 정치인들에게 ‘좌파적인 정책을 제대로 못해서 지지를 철회하였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겠지요.
글이 너무 길어서 극우파쪽인 한나라당과 그 지지자분들이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을 비난하는 ‘이유’를 검토하는 것과, 아무도 입밖으로 내어서 말하지 않지만 이 두 사람에게 국민들이 등을 돌린 ‘진짜 이유’는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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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 이어서 극우파인 한나라당과 그 지지자분들이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을 비난하는 이유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반들이 중도 우파 정부를 비난하는데 단골로 내세운 점은 ‘빨갱이 정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들인 노력과 비용을 ‘북한에 대한 무조건 퍼주기’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들이 극좌파라고 할 수 있는 북한에다가 핵을 포기하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은 자신들도 빨갱이들이기 때문이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난이 논리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말이 않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들 있지요.
일단 자본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믿는 자유주의자 혹은 민족주의 우파들을 보고 극좌파들을 비난하는데 사용한 ‘빨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부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경제정책이나 복지정책의 운용 면에서, 특히 한미 FTA 등 미국식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한 면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한나라당과의 차별점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억지 주장을 지속한 것은 딱히 다르다고 내세울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실제로도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이 집권한 동안에 대한민국은 더욱더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였고, 군사독재정부 시기에 일본식 자본주의를 수입하면서 마련하여 놓았던 사회적 안전망마저도 없애버렸습니다. 물론 좋아서 한 것은 아니고 IMF 등 외세의 압력에 떠밀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일입니다만, 극우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준 ‘은인’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그 지지자분들을 ‘극우파’라고 라벨링을 한 이유는 그들의 정책이나 정체성이 과거의 파시스트나 불란서의 르팽, 미국 네오콘들과 같은 극우파 정치인들의 그것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양반들은 자본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우파와 동일한 우파로 분류할 수 있지만, 전쟁이나 인권탄압을 무릅쓰고라도 좌파들을 ‘말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극우파라고 불러야만 합니다. 북한과 같은 극좌파들과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들을 말살하기 위해서라면 외세인 미국에 종속되거나, 군사 독재정부를 만들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보면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 (다음 편에서 진짜 이유가 자세하게 나올 것입니다만......)로 극좌파들에 대한 너무나 심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반응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좌파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우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우파’ 혹은 ‘민족주의 우파’인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백안시 하고 적으로 돌리는 태도는 좀 심하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우파들도 극좌파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두려움’은 극우파들과 다를 것이 없거든요. 다만 그런 문제점을 어떤 방식으로 돌파할 것이냐는 태도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그들은 ‘햇볕정책’이라는 말 그대로 비상식적이고 말썽꾸러기인 ‘북한의 극좌파 정권’을 어르고 달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한반도에서 현저한 전쟁위험 감소와 그에 따른 자본시장의 활성화로 나타났습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북한에 대한 대결정책을 지속하였다면 미국과 북한이 핵위기로 대립하던 마당에 우리가 지금처럼 발을 뻗고 잘 수 있었을까요. 대한 민국의 금융시장이 지금처럼 호황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도 한나라당에도 정신 나간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많은 부분 수용하도록 정책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자유주의 우파의 대북정책이 잘못되지 않았고, 그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빨갱이’라고 비난한 것이 터무니없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국민들 대부분이 이 점에서는 동의를 한다고 보입니다. 실제로 대북정책에서의 한나라당 변화를 비판하면서 독자출마 하였던 이회창옹 같은 이가 많은 득표를 하는데 실패한 점은 한나라당도 대북정책에서만큼은 전향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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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에 '증오'에 가까운 싫은 감정을 표출하는 '진짜 이유'는 사실 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과도 관련이 있고, 또한 의식적으로라도 남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점에 연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에리히 프롬 (E. Fromm)은 나찌스 치하에 탈출하여 미국과 멕시코에 정착하여 살았던 사회심리학자로, 자신의 조국인 독일이 당시의 기준으로도 대단히 민주적인 정부였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강권 독재국가인 나찌스의 제3제국으로 돌변하는 상황을 똑똑히 목격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도대체 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내동댕이치고 히틀러라는 '독재자'에게 매달리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밀접한 권위적 조직체에 개개인이 매달려 있던 중세인들이 근대화가 되면서 '개인'이 되어야만 하였던 상황에 주목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개체화 (individualization)의 과정을 통한 완전한 개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머니나 가족들과 마치 '탯줄을 끊지 않은' 듯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요. 이는 전근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권위적 조직체에 자신을 매어 놓음으로써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 상태입니다. 그러나 근대화를 통해서 인간은 '개인'이 되어야만 하였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강하게 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어나가듯이, 근대인들에게는 이런 심리적인 과정이 강제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독감'과 '무력감'이 증대되고 이를 원만히 극복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의 개체성을 외부의 강한 힘에 던짐으로써 이를 회피하려는 충동이 생기게 됩니다. 마치 어린이들 일부가 '피터팬 신드롬'에 몸을 던져서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양상입니다.
한중일의 동양삼국은 일찌기 근대화를 완성한 서구와는 달리 사회심층부에 이런 '유아적인 문제점'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부모에게 의지하고, 부모도 자식이 결혼을 하거나 직장을 잡은 다음에도 뒷바라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심리적으로 부모나 가족들 혹은 성장한 다음에는 학연집단, 출신지역집단, 직역집단 등의 강한 권위에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하고 자신을 던짐으로써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동양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이런 사회적인 측면이 완전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직도 공산독재를 행하고 있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파 정치인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국회의원직을 세습하는 일본도, 수상 자리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싱가포르까지 결코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고 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결정적으로 동양국가들의 국민들은 결코 개체화된 권위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탈시킨 '개인'이 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곤란 혹은 정치적인 혼란을 맞게 되면 언제든지 강한 권위에 자신들의 자유를 팔아넘길 준비가 되었다는 점이 문제일 것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이런 문제점일 깨달은 이들이 세운 정부였습니다. 군사독재정부와 싸우던 이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자연스레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윗세대와 절연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체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근대인들이 중세시대 사회적인 혹은 혈연적인 권위의 속박에서 자신을 해방하면서 심리적으로도 강한 '개인'이 되었던 것과 같은 과정이었지요. 흔히들 386세대를 경멸하는 분위기가 이 세상에 만연하였는데, 이는 아직도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찾은 이들에 대해 보내는 '질투'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자유로울 때에만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자유와 진리는 이렇듯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당연히 진정으로 자유로운 이들이 만든 이 정부는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가진 모순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서 그들이 이 사회의 지배층이 되어버린 사실, 독재정권에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던 그 사람들이 지금도 사람들을 재판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점, 영남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호남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야할 경제적 혜택을 박탈하고 좋은 자리를 독점하연 온 점, 온갖 뒷돈이 오가며 이권을 주고받던 공무원들과 기업인들간의 유착, 담합과 뒷돈으로 소비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을 가로채어 잇속을 챙기던 기업인들 등, 이성적이 못한 권위가 사람들을 속박하는 것을 시정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제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혈연, 학연, 지역 등 집단에 자신을 기대어서 자신들의 고독감과 무력감을 달래려고 하는 유아적인 심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지적'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순'에 대한 지적과 같았습니다. 실재로도 여권 내에서조차 자신의 조상이 친일파였고, 자신의 가족들이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자기 자신이 과거에 부정부패에 몸을 담궜던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으니 말입니다. 이른바 사회적인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입니다.
더군다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386세대들조차도 중년이 되고 자신의 가족을 꾸리고 직역집단에 들어가면서 과거에 누렸던 '자유'를 던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배자가 된 이상 피지배자에게 '자유'를 주면 싫것 부려먹을 수 없게 되거든요. 그들도 가끔 자신들이 잠시 가졌던 '자유'를 그리워하기는 하겠지만, 자신들의 후세를 조정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선배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권위에 기대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치 독일국민들이 바이마르 공화국하의 자유를 버리고 나치스의 독재국가를 선택하였듯이 일단 한 번 쟁취한 자유를 버리고 '권위'를 통해서 자신의 편안함을 도모한 것입니다. 사실 '자유'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댓가를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자유로부터 도피한 것이고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배들보다도 더 철저하게 부패하고 모순에 찬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치스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들 잘 기억하시지요?
이와 비슷한 일은 북송(北宋)대의 신종(神宗)조에서도 있었습니다. 당시 송(宋)은 5대 10국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화폐를 통한 중세 자본주의경제를 실현한 상태였습니다. 당(唐)대까지와는 달리 엄청난 양의 화폐가 국가에 의하여 강제로 유통되면서 거대한 중국 전체가 실질적으로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진 최초의 시기였지요. 그러나 이런 상태가100여년간 지속되면서 제도의 문제점도 드러났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요역(徭役)을 국민들에게 지웠던 점이 가장 큰 모순이었습니다. 즉,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징수해서 중앙에 수송하는 일까지 모두 일반국민들에게 의무로 부과하였는데, 단순히 징수만 아니라 수송까지 담당하게 하다보니 생산자들을 몰락하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지요. 이 이외에도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문제, 농업경제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풍흉(豊凶)의 교대에 의한 농산물 가격문제 등도 심각하였습니다. 신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서 이른바 '신법(新法)'이라 일컬어지는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면행법(勉行法)', '모역법(募役法)' 등을 잇달아 시행하였습니다. 당시의 경제적인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려는 이런 시도는 분명히 올바른 조치였고, 북송을 지배하던 관리들의 눈에도 이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일반 민중들이야 지적인 수준이 안되니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과거를 통해서 정계에 진출한 지식인들인 관리들은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한기(韓琦), 소동파(蘇東坡), 사마광(司馬光) 등 이른바 구법당(舊法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신법을 성토하였습니다. 이들은 '조법(祖法)을 파괴한다'는 논리로, 한마디로 과거의 권위에 복종하여야만 한다는 논리로 그 당시의 모순에서 눈을 돌린 것입니다. 신종이 재위 15년 만에 죽고 섭정으로 선인태후(宣人太后)가 철종조에 집권하게 되면서 신법은 폐기됩니다. 그러나 신법을 추진한 쪽에서도 반격을 가해서 결국에는 향휴 30년에 걸쳐서 신법당과 구법당이 번갈아서 업치락 뒷치락하게 되지요. 어떤 조치든지 적어도 30년은 안정적으로 시행을 하여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법입니다. 당시에는 경기순환의 속도고 현대 사회에 비하여 현저하게 느린 중세였는데, 고작 8년여의 시행만으로 경제적인 모순이 해결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만다 법 시행이 뒤집어지는 사태가 반복되면서 신법(新法)은 효과를 보기는커녕 사회적인 분열만 부추긴 꼴이 되어버렸지요. 결과는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는 금(金)나라의 북송침략으로 나타났습니다. 북송은 망하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나서 남송(南宋)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회모순에 대한 지적은 당대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상당한 지식인들에게 조차 심리적인 불안감을 가져다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떤 형태가 되었든 수용하여서 극복할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번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모순이 없다고 눈을 감아 버린다고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 부역하였던 이들의 후손들이 호의호식하면서 건재해 있는 점을 모든 이들이 잘 알고들 있는데, 그들에게 마음 속 깊이 복종하겠습니까? 과거 군사독재정권에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던 이들과 그 자손들이 지금도 사람들을 수사하고 재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조치에 수긍할까요? 호남인들도 적어도 이 나라의 30%는 되는데 그들을 천시하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는다면 그들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겠습니까? 서로 담합하여서 가격을 조절하고 뒷돈을 주고받아서 치부한 기업인들을 과연 사람들이 존경할까요?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적어도 눈에 띄는 부정부패를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기껏 주고받았다는 것이 아녀자들 옷로비나 신정아 사건에서 보이듯 혼외애정행각들 아니었습니까?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권위에 복종하여서 자유를 팔아넘기고 그 댓가로 안락을 구하던 이들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지도, 그들에게 손해가 나는 정책을 취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떠올려주는 이들이 집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껄끄러웠던 것이지요. 이런 무의식적인 불편함, 혹은 언제 자신이 행한 부정이 들통나고 자신의 비합리적인 권위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모든 것은 노무현때문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표현의 형태로 표출된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비가 많이 와도 노무현 때문, 장사가 안되도 노무현 때문, 태풍이 와도 노무현 때문, 석유가 새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그렇게 매도하지 않았나요?
자, 이제 긴 글의 매듭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두 편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 특히 사람들이 내놓고 하는 비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점, 즉 자신들이 아직 완전한 개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유아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고, 그래서 고독감과 무력감을 달래기 위해서 비합리적인 권위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자꾸 깨닫게 해주는 존재인 김대중,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 우파 정부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어린아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 길러내지 못한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회구성원 전체가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회라면 그것은 결코 건전한 사회 (the sane society)가 될 수 없습니다. 지적 수준이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유를 한번이라도 누렸던 이들이라면 제발 정신차리시기를 바랍니다. 자유를 반납하여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유아기적 퇴행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들까지도 성장하지 못한 피터팬으로 묶어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즘 20대들을 보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서량도 부족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조차도 없습니다. 이는 사회를 건전하게 이끌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입니다. 아이들을 벼랑끝의 경쟁으로만 내몰아서 폭 넓게 독서하고, 토론하고, 생각할 기회를 빼앗아버린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88만원짜리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점보다 그 모순을 이해하고 극복할 능력을 빼았겼다는 점이 그들의 진정한 불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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